2015년 마지막날 삼실



프로젝트 evaluation 쓰다가써야하는데 하루종일 혁오밴드 듣다가 벌써 두시가 넘었다. 아니 이 기타와 이 목소리라니. 내년에 글라스톤베리 오나요. 물론 나는 와도 사람 많아서 안가겠지만. 언젠가 라이브로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. 

지금 맥밀란 5층에는 단 일곱명이 앉아서 일하고 있다. 평소에는 아마 백오십에서 이백명 가량 일하는 거 같은데. 당연히 우리 디비전 중에는 나 혼자만 나와서 일하고 있고, 푸하하 덕분에 나는 이 글을 여기에 지금 이 시간에 쓰는 악행을... 
주 느끼는 거지만, 영국 참 널널하게 일한다. 


삼성에서 나와서 맥밀란으로 옮긴지 10개월이 되었구나. 올해 마지막날이라니까 왠지 근황을 정리하고 싶어진다. 

* 참고로 맥밀란(정확히는 맥밀란 캔서 서포트)는 영국에서 두번째로 큰 암환자 관련 자선단체다. 나는 여기서 시니어 마케팅 프로그램 매니저로 일하고 있으며 주로 하는 일은 영국 일반인들을 상대로 기부금 모금을 위한 마케팅 활동. 

'파는 것'이 다를 뿐 사실 이전에 하던 프로덕트 마케팅이나 제약업계 PR 업무랑 엄청 다르지는 않다. 여기서도 프로젝트 매니지먼트, 광고 결정, 광고 디자인, 에이전시 선정 및 브리핑, 고객(기부자) 응대, 끝나고 평가 등을 하고 있다. 

오래전부터 꿈이었던 자선단체에서 일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. 

* 일단 내가 하는 일이 다수의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돕는 일이라는게 굉장히 기운이 난다. 단체의 특성상 환자들의 얘기를 많이 듣거나 읽게 되는데, 그렇게 죽음과 매일매일 간접적으로 대면하는 상황이 작은 것을 더 감사하게 만들어주는걸 깨달았다. 나는 건강하고,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고, 내 가족과 지인, 친구들 모두 건강히 지내고 있다는 게 굉장히 운이 좋은 기적과도 같은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. 

* 출, 퇴근 시간이 9-5로 칼 같고, 내 시간이 많아지니까 집에서 매일 저녁을 지어먹고 거의 매일 운동을 하고 책을 훨씬 많이 보게 되었다.

* 사내 분위기도 굉장히 좋고, 특히 트레이닝 코스와 HR policy가 굉장히 인상적이다. 
영국이 차별대우에 대한 법이 (한국에 비해) 잘 되어 있는 건 알았지만 삼성에 있을때는 그게 실제로 적용되는 적이 별로 없어서 잘 못느꼈는데, 확실히 여기는 성별, 민족, 언어, 나이, 결혼 유무, 성적 취향, 외모 등에 대한 차별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며 잘 지킨다는 걸 느꼈다. 몇달 전 페이스북에서 슬쩍 본 기사에 나온 [대기업에 입사한 사회 초년생인데 부장급들이 매일 '여자는 집에가서 밥이나 하지 왜 회사 다니냐'라는 말을 해서 너무 힘들어요] 보고 기겁했다. 일단 여긴 그런 쭉정이들은 용납되지 않는 사회라는게 감사하다. 


채리티로 옮기면서 내가 우려했던 건 적은 연봉과 차가 없어지는 거, 영국인99.99% 동료, 새로운 업무에 대한 적응.. 정도였었다.
 
* 연봉은 대략 15K 깎아서 옮겼다. 젊은 나이부터 돈때문에 하고싶은 일을 못해보는 바보짓은 하고 싶지 않았고, 사실 연봉이 확 깎이면서 세금 요율도 낮아져서 괜찮다. 삼성시절과 비교해서 라이프스타일을 바꿀 정도로 수입이 달라지진 않았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아무 상관 없는거였다. 차가 없어진 건 아주 가끔 시골로 여행갈때나 비오는 날 버스 기다릴때만 조금 불편했고, 출퇴근을 버스로 하니까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어서 너무 좋다. 내가 운전을 그렇게나 싫어했구나..를 매일 운전해서 출퇴근하지 않게 되니까 깨달을 수 있었달까. 

* 영국인 99.9% 동료. 아아아.. 더군다나 내가 있는 12명 팀은 죄다 20-30대 영국여자들이다. 전형적인 깍쟁이 여자들, 그 중에 대다수는 extroverted인 가운데 introvert + 대인기피증 있는 내가 끼어들어서 적응하는 게 처음에 굉장히 힘들었었다. 맥밀란 전체 1000명가량 중 한국인은 나 한명인거 같다. 딱 나같은 성격인데 영국에서 임원급까지 올라간 롤모델 한 명 있으면 참 좋겠다.. 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. 

그러니까.. INFJ 타입의 내성적이고, 나서는 걸 싫어하며, 아빠가 외교관이라 세살때부터 시애틀 10년 두바이 5년 런던 10년 살았어요 이런애 말고, 나처럼 알파벳 중1때 처음 배운, 영어가 생짜 외국어이며, 성인이 되어서 영국에 처음 와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가서 마케팅 & 커뮤니케이션 부분에서 성공한 한국 여성 말이다. 어디 안계신가요. 아 열렬히 보고싶어요. 



아. 세시 반이다. 공휴일 전날은 세시반 퇴근이라고 말 했던가? 푸하하
짐싸야지



덧글

  • 2016/01/26 05:31 # 삭제 답글 비공개

    비공개 덧글입니다.
  • 2016/01/26 06:47 # 삭제 답글 비공개

    비공개 덧글입니다.
  • 2016/03/15 02:41 # 답글 비공개

    비공개 덧글입니다.
  • shez 2016/10/24 18:41 # 삭제 답글

    왜요즘 안하세여 ㅜ정말 즐겨보고 있던 블로근데... 기다리기 치졌써용
  • 겨울 2016/11/17 18:58 # 삭제 답글

    마쟈여ㅠ 저도 자주 들렀는데 근황 궁금해욤! 글 재밌게 잘쓰셔서 몰래몰래 자주왔었거든요ㅎㅎ 건강하게 잘지내고 계시겠죠? :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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